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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스탄에서 보낸 편지

사마르칸드

엎치락 뒤치락 설잠을 자다가 새벽에 깼다. 이제 가야하는 거다. 8월15일. 내 우즈벡 비자가 이미
반은 날아가 버렸다. 왜 벌써 가느냐고, 자기집에도 가자는 친척 아줌마들과도 작별을 하고,
도시락으로 싸주는 빵과 사탕을 들고는 사마르칸드로 향했다.

국경에 도착해서 막 떠나려는데 누가 나를 부르며 아는 척을 한다. 아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는데.
돌아보니, 무르갑! 무르갑! 한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왜국인 태우고 왔던 지프의 기사아저씨다.
나도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곧 헤어졌다. 정말 짧은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 내게 인사를 해주는
그들의 친근함이 타직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이다.

국경은 작았지만, 통과하는 데에는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다른 이유는 없다. 제대로 일을 안하기
때문이다. 열명의 직원이 있으며 두세명은 일하고, 나머지는 차 마시고 수다떨고, 구경이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들을 통과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갑갑하게 일들을 한다. 이제는 그런
일들에도 익숙해져, 짜증도 안나지만. 작고 허술하지만, 종이에 적을 것도 많고, 질문도 많은
우즈베키스탄 국경을 통과해서, 드디어 나는 타직을 떠났다.

사마르칸드까지 싼 다마스를 탈까 조금 더비싼 넥시아(씨엘로처럼 생긴 대우 승용차다)를 탈까 하고
있는데, '한국사람이에요?'하는 한국말이 들렸다. 깜짝 놀랐다. 한달 반만에 처음 듣는
한국말이었다. 한국에서 3년동안 일했었다는 아저씨였다. 오랜만의 한국어에 그만 정신이 팔려서
그 아저씨 차를 타고 말았다.

국경을 넘기 전까지 우즈벡과 한국의 관계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었던 건, 우즈벡에 한국담배공사
공장과 대우자동차 공장이 있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실제로 국경을 넘고, 내 눈으로 직접 보니,
우즈벡에서의 한국의 입지는 아주 컸다.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의 70% 정도가 대우였고, 잠시 가본
한국대사관앞의 비자를 받으려고 늘어선 길다란 줄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동양인을 보면 인사처럼 '주몽!'하고 외치고, 중국에서 왔니? 하는 질문은 거의 없고,
한국사람이냐는 물음이 가장 먼저 나온다. 이 나라의 아이들이 유행처럼 입고다니는 주몽 티셔츠를
나도 조카주려고 한벌 사버렸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국말을 하고, 아무나 보면 한국이냐고
물어오고, 주몽! 하고 외치는 걸 보고 첨엔 약간 흐뭇한 기분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일본
사람들은 기분 나빴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프리카나 이란 같은 다른 나라들에서 내게 사람들이 차이나! 혹은 재키챈! 하고 외치던 거나
마찬가지 상황이잖아. 중국으로 오해받는거랑, 한국으로 오해 받는게 같을리가 없다고도
생각하지만, 아시아에서는 자기들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일본애들에게는 똑같이 기분 나쁠수도 있지
않을까.

한국어하는 아저씨의 차를 타고, 나는 사마르칸드로 갔다. 내 중앙아시아행 두번째 목표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우즈벡으로 국경을 넘고부터는 대체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호텔도 쉽게
찾았고. 그 호텔은 나를 쉬게 해주었다. 외국인들도 많아 정보수집에도 좋았고, 한국사람도! 만날 수
있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처음 만나는 한국 여행자였다.

사마르칸드에는 뭐가 있는가. 멋진 이슬람의 유적이 있다. 14세기의 티무르시대에 만들어진. 하지만

지금도 남아있는 그 멋진 모스크들과 마드라사(신학교)들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여긴 멋진 도시였던
모양이다. 알렉산더가 와서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것을 빼면 내가 들은 것과
전혀 다른 것이 없다' 라고 말했다는 걸 보면.

내가 사마르칸드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건, 레기스탕의 타일장식 때문이다. 레기스탕은 세개의
매드라사인데, 그 중 오른쪽에 있는 건물의 윗부분에 동물과 사람의 얼굴이 장식되어 있다.
이슬람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사실, 이건 이슬람에서 가장 금기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들은, 우상숭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절대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그리거나
만들지 않거든.

호랑이처럼 보이는 사자의 그림과, 태양속의사람의 얼굴을 그려 장식한 이 매드라사를 만든 사람은,
역시나 다른 학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고, 그들을 달래기 위해서, 정면에 보이는 또하나의
매드라사를 만들었단다. 황금으로 장식된 천장을 가진 모스크도 포함된.

사마르칸드에서는 이틀을 묵었다. 벼르고 있었던 곳이니만큼, 레기스탕 외에도 왕들의 무덤군인
샤히진다, 구리아미르 무덤, 바자르 등을 열심히 관광도 했다. 이번 중앙아시아에서 나는, 아주
충실하게 관광도 하고 있다.

시간을 쪼개어 관광을 하고, 나는 타쉬켄트로 갔다. 마지막 하나 남은 비자, 아제르바이잔의 비자를
받으러. 짜증나는 일이지만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비자다. 비자가 없으면 여행이
불가능해지니까. 아제르바이잔 대사관의 영사는 아주 친절했다. 일본애들보다 10불 더 비싼 50불을
내긴 했지만, 비자는 아주 쉽게 나왔다. 모든 나라의 비자가 이렇게 받기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아제르바이잔까지, 이번 터키까지의 비자를 다 받고, 그루지아는 무비자로, 아르메니아는
국경비자로 들어갈 수 있다고 좋아했더니, 세상에 전쟁이 터졌다. 무비자로 갈 수 있는 나라에
전쟁이 터져, 아예 갈 수 없을지도 모르게 되었다. 그루지아를 통과할 수 없다면, 하는 수 없이, 정말
싫지만 이란을 통과해서 터키로 갈 수 밖에. 왜, 전쟁따위는 하고 지랄들인지.

타쉬켄트에서는 꼭 일주일을 머물렀다. 비자 받고, 충전기를 구하는 것 말고는특별히 할 일은
없었지만, 한국사람들을 만났고, 키르기스에서 만났던 일본친구를 다시 만나 즐거웠다. 오랜만의
한국사람, 한국어에, 입에는 모터가 달린 듯 나는 떠들어댔고, 한국식당에도 갔다. 역시 고향은
그리운거다. 나는 특히나 음식이나 집 보담은 말을 그리워한다.

일본친구랑도 엄청난 수다를 떨었다. 이제까지 서로 얼마나 힘들었는가, 나는 두샨베에서의 날들을
불평했고, 그 친구는 타쉬켄트의 투르크멘 대사관을 불평했다. 요즘 타쉬켄트의 대사관에서는
하루에 비자를 10명정도에게밖에 주지 않거든. 그것도 뺵 있는 사람이나 뇌물 쓰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주고나면, 일반 여행자들에게는 한두사람에게만 순서가 돌아온단다. 대사관으로
사나흘을 다니고서야 겨우 신청이 가능하고, 받는 날도 같은 고충을 반복해야하지. 밤12시에 가서
리스트에 이름적고, 다시 새벽부터 줄 서고, 완전 고생인거지.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는 모든 여행자들에게 투르크멘 비자 받기는 무용담이 된다. 나는 두샨베에서
외롭긴 했지만, 받아오길 정말 잘한거지.

 

09/05/2008 10:30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