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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스탄에서 보낸 편지

드디어 떠나다

타쉬켄트. 우즈베키스탄의 수도까지 왔다. 지난 열흘간, 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내 중앙아시아행은 착착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이제 비자도 다 받았고, 터키까지는 순조롭게 가는
일만 남았다, 생각했더니 그루지아에서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조금 주춤하긴 했지만.

지난 열흘간 생긴 일들중 가장 나빴던 건, 카메라 충전기가 망가진거다. 정말이지 땅을 치고, 벽에
머리라도 찧으며 자학이라도 하고 싶었다. 씨벌, 이놈의 두샨베에서는 되는 일이 없어! 하면서.
두샨베 시내를 다 뒤져봤지만, 내 카메라와 똑같은 카메라는 없고, 호환되는 거라도 없을까 싶어
물어볼라치면,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고개를 저으며 노! 라는 말부터 나오니. 절망했었다.

한국에서 받으려고 해보니, 그것도 쉽지가 않아 십몇만원을 들여 택배로 받는 길밖에 없어, 그거라면
여기서 싼 카메라 하나 사는게 낫겠다 싶어 백화점엘 가보니, 카메라가 딱 한대 놓여 있더군. 그래서
한국식당 가서 여기 사시는 분한테 물어보니, 전자상가를 적어 주시길래, 호텔 리셉션 아줌마한테
물어보니, 세상에, 그게 우리 호텔 바로 뒷거리인거다.

거기에서 배터리 충전기 전문상을 찾아서,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 안에 잔뜩 들어있던 충전기 중 하나를
구할 수 있었다. 정말 허접하게 생긴걸, 5일치 방값을 주고 구해왔지만, 터키까지만 버텨준다면 그걸로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게 걱정하고, 짜증내고 하던걸, 우습게도 호텔에서 1km가 채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서 해결한 거지.

지난번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전기로 쓰는 전기로 충전하던 중, 벼락이 친 후, 충전기가 망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전압이 불안정하던 무르갑에서 충전하다 망가진 모양이었다. 전자 기술자인
일본사람이 뜯어본 후에 알려주더군.

이런 일들이 생길 때마다, 나는 아직 문명의 이기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이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까짓 사진, 안찍으면 되지. 하지만 이제부터 갈 부하라, 히바,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을
생각하면, 그게 잘 안된다.


투르크멘 비자는 문제없이 나왔다. 받기 전날까지는, 과연 비자가 나오기는 할까, 비자가 안나오면
어떡할까,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차라리 타쉬켄트에서 받을걸 그랬다며 후회를 하기도 했지만,
받게된 당일에는 담담했었다. 못받으면 우즈벡 비자 연장하고(엄청 비싸긴 하지만) 우즈벡에서
받지 뭐, 하며. 재수생이 떨어지면 삼수하지 뭐, 하는 것처럼.

아침에 대사관에 갔더니, 투르크멘 영사는 2주 전 비자를 신청할 때와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이었다.
중간에 확인전화 했을 때, 화를 내던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인가 싶었다. 혼자 다니면 무섭지 않느냐는 둥,
관계없는 질문을 하는 영사에게 건성으로 답을 해 주면서, 전화하라고 전화번호까지 적어주셔놓고,
그땐 왜 그렇게 화를 내셨냐고 따져묻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괜한 미움을 사게될까 두려워, 머릿속에
참을인(忍)자만그렸다. 참는 자에게 비자 있나니.

돈을 내고 여권을 맡겨놓고, 세시에 찾으러 오라는 말을 듣고는,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가능하면 그날
밤차라도 타고 떠나고 싶었다. 알아보니 그날 오후 5시에 출발한다는 차들이 많았다. 가방 챙겨서
체크아웃을 하고, 세시까지 기다려서 비자 받자마자 바로 떠야겠다고, 마음이 급해져서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던 도중 정신을 차렸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닐테니까.

잠시라도 이 징글징글한 도시를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에 바로 출발한다면, 또 깜깜한 밤중에, 12시나
1시쯤 도착하게 될텐데, 제대로 된 호텔이 하나도 없는 펜지켄트에서 나 혼자 고생하는 걸로 끝나지
않고, 애꿎은 현지인들까지 고생시키게 될게 뻔하니까. 맘을 다스렸다. 이제껏 기다렸는데 하루 더
못기다릴까.

지긋지긋했던 이 도시 두샨베와 작별할 시간을 갖자, 씨디도 굽고, 샤워도 하고, 저녁엔 맥주라도
마시면서 작별인사라도 하자, 그렇게 맘을 다스리고, 우체국에서 내려, 당분간 못쓰게 될 인터넷을
썼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날 떴다. 떠야할 운명이었나보다.

비자를 받아서 저녁으로 먹을 빵을 사서는 호텔로 돌아갔더니, 이제껏 잠잠하던 리셉션 쌈닭아줌마가
또다시 난리를 치는거다. 돈 더 내라고. 또다시 시작된 악몽이었다. 이 아줌마만 끝까지 나한테 인사도
안하길래 약올리려고, 다른 두 아줌마들 사진 찍어서 뽑아 줬었거든. 결국은 내가 다시 당한거지.
또 예의 그 손 휘저으며 '파루스키~'가 나오길래, 집어치워라 그러고 그냥 가방 짊어지고 나와버린거지.
행여라도 내가 두샨베에 정이들어 떠나기 싫어질까봐, 마지막까지 정떨어지게 해준 모양이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08/23/2008 02:15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