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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스탄에서 보낸 편지

추억의 타쉬켄트

편지는 이제 겨우 우즈베키스탄을 시작했을 뿐인데, 나는 지금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 아쉬가밧을
떠나, 아제르바이잔으로 가는 페리가 출발하는 투르크멘바쉬로 가는 기차 안이다. 중앙아시아가
거의 끝나가는 거다.

두샨베에서 참 길게도 편지를 썼던 날들 외에, 우즈벡으로 넘어온 이후로는 거의 편지를 쓸 시간이
없었다. 너무 탓하지는 마라. 편지쓸 시간이 없다는 것은, 내가 이곳저곳 부지런히 다니고 있거나,
나를 심심하지 않게 해줄 누군가가 가까이에 있다는 말이니까.

타쉬켄트에서는 바쁘진 않았지만, 같이 맥주 마시면서 수다 떨 친구들이 늘 있었고, 1주일만에
타쉬켄트를 떠날 때는 일본친구와 함께였다. 사마르칸드에서 부하라로 갈땐 다른 일본아이들 셋이
더 붙어 무려 다섯명이 함께 이동했고, 그 중 한명이랑 히바, 모이낙, 누쿠스까지 갔다가,
투르크멘으로 국경을 넘은 후에는 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콘예 우르겐치와 아쉬가밧을 구경하러
다니느라 피곤에 쩔었다.

그리고 오늘 아쉬가밧 시내에서 다른 일본친구를 우연히 만나 같이 기차를 탔다. 이제부터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기차가 투르크멘바쉬에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고, 바쿠가는 배가 출발하는
것을 기다리고, 배가 바쿠에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면 된다. 그러면 나는 중앙아시아를 마치고,
카스피해를 건너, 카프카스의 여행을 시작하게 되는거다. 키르기스로 국경을 넘은지 꼭 두달만에
투르크멘을 떠나 중앙아시아가 끝나게 된다. 기다리는 일만 남았으니 시간도 많겠지. 그럼 편지 쓸
시간도 많을거다.


타쉬켄트는, 이제 먼 옛일처럼 만 느껴지는 타쉬켄트는, 두샨베만큼 끔찍하지는 않았다. 한국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 한국식당을 비롯한 한국 관련 가게들도 많았고, 팥빙수를, 세상에 팥빙수를
먹었다는 것 아니냐. 수십개국을 다니면서 솥뚜껑삼겹살까지 온갖 한국음식은 다 봤는데, 팥빙수는
파는 곳이 없구나, 그립구나 했는데, 타쉬켄트 시내 중심가에서 발견한거다. 덕분에 같이 있던
한국아이가 감기에 걸리긴 했지만.

우즈베키스탄에는 없는게 없었다. 모든 것이 있는 타쉬켄트라 편하기도 했지만, 나를 가장 만족시킨
건 역시 사람들이었겠지. 외롭지 않아 좋았다. 그리고 다시 만난 카즈. 비쉬켁에서부터 알던 일본
친구다. 카즈는 나더러, 타쉬켄트에 가면 ***의 집에 묵으라고 했었다. 호텔은 아니고, 홈스테이
같은 건데, 세끼식사 푸짐하게 포함해서 9000솜. 7000원 정도인거다.

하지만 내가 카즈를 다시 만난건, 다른 호텔이었다. 더 비싸고, 식사도 없고, 방도 지저분하고,
화장실과 욕실에는 바퀴벌레들이 기어다니는. 왜 그 좋은 홈스테이로 가지 않았는가. 외국인 등록
때문이다. 우즈벡에서는 개인이 직접 경찰서에 가서 등록을 하는게 아니라, 호텔에서 등록증을
주거든.

지하철 역에 좌악 깔린 경찰들이 가끔씩 외국인들을 붙들고 여권검사를 하는데, 그때 재수없게
걸리면 벌금 내지는 뇌물이 100불 정도 필요하거든. 타직에서 실수로 군사경계선을 넘어 고생한
기억이 있는 카즈로서는 또다시 그런 기억을 갖고 싶지 않았겠지. 싼 것 좋아하는 일본애들도 전부
같은 호텔에 모여 있었고, 나도 그리로 갔다.

사실 나는 딱 한번 여권검사를 당했는데, 그건 카즈와 함께 있을 때였다. 1센티가 채 안되는 짧은
머리에 쌔까맣고 비쩍 마른 카즈는 내가 봐도 수상하게 생겼다. 너, 인민군 같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상처받을까봐 참았다.

우리는, 다른 일본아이들과 함께, 매일 6층 베란다에서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여행 정보를
교환하고, 여행 무용담을이야기하고, 웃기도 하면서 타쉬켄트의 날들이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 달은
보름이다가 점점 이지러지면서, 뜨는 시각이 늦어졌다.

불을 켜면 벽으로, 변기위로 사사삭 기어다니다 사방으로 흩어지던 화장실의 바퀴벌레들,
샤워꼭지는 없고, 허리보다 낮은 위치에 수도꼭지가 있을뿐이라 쭈그리고 앉아서 힘들게 샤워를
해야했던 불편한 욕실과, 정서향의, 오후가 되면 자동차의 소음과 함께 엄청난 열기가 쏟아져
들어오던 뜨거운 방이었지만, 밤의 그 시간이 있어, 그 호텔은 내게 추억의 호텔이 되었다. 방에서
바라다 보이던 서커스극장도 함께. 추억의 타쉬켄트다.

 

09/05/2008 10:47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