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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스탄에서 보낸 편지

비쉬켁으로

잠시 후 버스는, 허름한, 차고 같은 곳에 멈추어 섰다. 내려서 보니, 거기는, 이동중 사람들이 묵어가는
아주 간단한 숙박시설이었다. 실크로드 시절엔 캐러반사라이였겠지. 여기서 묵어가는건가 싶었는데
보니, 일부 사람들이 거기에서 내리는 모양으로 짐도 같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버스는 밤새 달려 온
보람이 있어, 오쉬를 50킬로 남겨 둔 상태라고 했다.

잠시 쉬었다가 버스는 다시 출발했고, 두 시간 뒤인 8시에는 오쉬의 정류장에 도착했다. 아직 이른
시각이니, 곧바로 비쉬켁으로 가도 되겠다 싶었다. 월요일에는 타직 비자를신청하고 싶었으니까.
가능하면 토요일 밤에 도착해서 일요일 하루는 정보 수집도 좀 하고, 쉬어두는게 나을 듯했다.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중국 사람들이 기다리란다. 자기들 차로 비쉬켁 가는 정류장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우리 버스는 간난애기까지 합해서 꼭 30명이 있었다. 그 중 15명은 파키스탄 부자 대가족이었고.
버스에서 내 자리를 찾아가다 보니 아줌마들이 머리에 히잡을 쓰고 있길래 쌀람 알라이꿈 하고
인사를 했더니, 와알라이꿈 쌀람 하고 답이 돌아온다. 할머니가 좀 젊은 아줌마한테 날 가리키며
얘 영어하더라, 하자 젊은 아줌마가 영어로 어서 왔느냐고 묻는다.

자기들은 파키스탄 사람이고, 가족이 함께 비쉬켁에 있는 친척 만나러 가는 길이란다. 첨엔 파키스탄
사람이라는 것 만으로 반가워서, 반갑게 수다를 떨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면서 보니 역시 아니더군.
그런 대가족이 이 비싼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면 파키스탄에서는 상당한 부자일터였고,
역시 그런 부자들은 안하무인,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하인으로 부리려고 하거든.

자기 네 삼촌은 포토그래퍼라더니, 내가보기엔그저 카메라만 좀 큰거 들고 다니는 동네아저씨 더구만.
계속 카메라는 목에 걸고다니면서, 사진찍는건 거의 못봤으니까. 그냥 이동에네서는 귀한 카메라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암튼 내가 그들의 하인이 되어줄 이유는 없는거라 결국 그들을 무시해
주는 것으로 끝났지만.

중국에서 출발한 버스인데 중국사람은 몇명 없었다. 오쉬에서 사업하는 아저씨와 그 아들이 있었고,
그들과 함께 온 젊은 남자가 있었다. 대학 다닌다는 아들이 영어를 좀 해서, 가끔 통역을 해줬다.
이 남자는 자기가 차지한 좋은 자리에, 내가 파키스탄여자랑 수다떠느라 앉아있으니, 자기자리면서,
자기가여기에서 자도 되느냐고 묻길래 그러라고했는데, 그러고도 내가 계속 떠들고 있으니, 나한테
그 자리를 양보하고 자기는 불편한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러면 날 미워해야 당연한 건데, 버스 설 때마다, 밥먹는 시간이다, 화장실 저기 있다, 여권 꺼내라
하고 챙겨줬다. 물론중국어로. 파키스탄 여자는, 내가 그 자리 자기 가족한테 양보하지 않는다고
파키스탄말로 내 뒤에서 계속 궁시렁거리고 있었고.

그들의 차가 우리를 태우러 오고, 아버지가 자기집에 가서 세수도 하고 밥도 먹고, 그러고 가라신다.
중국어가 안돼서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갔다. 남자 세명밖에 없는 집에 그냥 따라가도 괜찮을까 생각도
했지만, 좋은 사람들일거라는 확신도 없지 않았다.

먼지투성이인 머리까지 감고 싶었지만, 이동을 하다보면, 또 먼지투성이가 될텐데 싶어 세수만 하고,
발도 씻었다. 아버지가 끓여주신, 계란도 들어간 라면을 먹고, 가는 길에 먹으라며 싸주신 빵과 우유도
받아서는 기사가 태워주는대로 택시정류장으로 갔다.

버스는 원래 없는건지 시간대가 안맞는 건지 없다고, 합승택시를 타란다. 1100솜이란다.
30달러가 넘는 돈이다. 700킬로를 가는데, 아주 비싼거지. 깎아보려고 1000솜에 해달라고 하니,
안된단다. 같이 있던 기사가, 100솜 내가 줄게 하더니 내 버린다. 100솜이 없어서 그런건 아니었는데.
어쨌든 고마웠다.

다행히 합승택시는 소말리랜드처럼 앞에 둘, 뒤에 넷 타는 빡신 택시가 아니라 승객은 넷뿐인,
보통 승용차였다. 그것도 벤츠. 창문은 돌려서 여는 거였지만그래도 그 정도면 갈만했다. 기사가 다른
승객들에게 나를 까레이스라고 소개했다. 러시아 말로 한국사람을 까레이스키라고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키르기스에서는 까레이스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나는 까레이스가 되었고,
내가 탄 택시의 기사는 완전 카레이서였다. 내내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

700킬로였지만, 직선도로는 거의 없고, 3000미터가 넘는 산을 두개나 넘어야 했으므로, 카레이서
아저씨가 엄청난 속도로 밟아대도 시간은 꽤나 걸렸다. 그리고 자주 서기도 했다. 기름 넣고, 좀 가다
보니 호수가 나왔다. 호숫가에 세워놓고 모두가 훌렁훌렁 벗고는 수영도 했다. 또 달리다가는 점심
먹고, 차가 산 속의 평지를 달리다 보니, 파오가 많이 있는데에 서서는 요구르트도 마시고 갔다.
나더러도 마셔보라고 주길래 우유인줄 알고 한모금 마셨다가 컥컥거렸다. 첫맛은 짰고, 뒷맛은 엄청
시었다. 그래도 하나도 안마실 순 없어, 몇모금 더 마시긴 했지만, 결코 맛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리고 차는 뭐가 좋지 않은지 자주 서서 점검을 했다. 그래서 비쉬켁까지는 12시간 가까이 걸려
도착했다. 자꾸 늦어지는게 좀 짜증나긴 했지만, 나중엔 네라 모르겠다, 한 차 타고 같이 소풍다니는
기분으로 같이 갔다. 그리고 밤9시반. 비쉬켁에 도착하고나서부터 고생길이 시작되었다.

 

08/04/2008 06:52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