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스탄의 대부분의 주택이 그렇듯, 넓은 정원에 몇개인가 작은 건물이 서 있고, 담은 전부
담쟁이덩쿨 같은 풀로 덮여 있다. 마당 한켠엔, 풀로된 동굴 같은 것도 있다. 애니메이션 토토로에
나오는 뒷뜰의 굴 같은. 비록 나무 밑둥은 아니었지만, 만화같은 굴이 있길래 뭐가 나올까 싶어 빠져
나가보니 별건 없었다. 또 다른 뒷뜰이 나왔을 뿐.
그리고 내가 묵게 된 방이 있는 건물은 여행자들의 숙소라기 보다는 옛 귀족의 별장같은느낌이 강했다.
침대 하나에 작은 화장대가 있던 구석의 내 방은, 귀족의 하녀가 묵을 듯한 방이었고. 그리고 다른
방들은 방이라기보다 응접실 같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잘 꾸며진 방이었다. 몰래 살짝 들여다보니,
가구에, 그림에, 장난아니더군.
으시시한 건, 커텐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계단 옆이나 복도 옆 같은 곳엔 커텐으로 가려진 어두운
공간들이 많았다. 게다가 더 무서운 건, 역시나 목조로 만들어져 삐걱이는 소리가 나는 이 괴기스런
건물에나 혼자뿐인 듯하다는 사실이었다. 밤이 깊어지면, 내 방 바로 옆의 응접실에서 귀신들이
파티라도 벌이지 않을까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데, 누군가 내 방을 노크하며 헬로! 한다.
문을 열어보니 웬 백인남자가 건넌방에 묵는다며 그냥 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란다. 그러냐고
무서웠는데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하고 보냈는데, 더 괴기스러운 건, 그 방에 불이 안켜진다는
사실이었다.
비쉬켁에서 일본아이한테 받아온 책을 읽었다. 두달전 다른 일본아이가 추천해 준 책인데, 마침
이 친구가 갖고 있더라고. 아까워서 안읽고 오늘 같이 할 일 없는 날 읽어야지 하며 들고 있던 책인데,
딱 좋았다. 아주 웃기는 책이라 혼자 킬킬거리며, 밤의 두려움을 달래기 좋은 책이었다. 책을 읽다가는
12시쯤 되었나. 전기가 나갔다. 자동소등인가보다 하고누워서 잠을 청하려는데 다시 불이 들어온다.
계속 책을 읽을까 하다가는, 다음날 일찍 일어나야하기도 했고, 그냥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 일어남과 동시에 화장실로 달려갔다. 밤엔 약간 속이 불편한 정도였는데, 폭풍같은
설사가 시작된거다. 특별히 맛에 이상은 못느꼈었는데, 락면에 문제가 있었던 건지, 최근 많이 먹지
않다가, 락면 한그릇도 과식이었던건지. '바자르에서 먹으면 배탈'나하며 비싼 호텔내의 식사를
팔려고 하던, 호텔 매니져아저씨의 저주였는지. 아침부터 기운이 쭉 빠졌다.
그날 나른이라는 곳으로 가서 후에 오쉬까지 가려던 계획이었는데. 이런 설사를 안고 장거리버스를
탈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아침으로 먹으려고 사둔 빵도 안먹고, 물도 한모금 안마시고, 일단 짐을
꾸렸다. 다시 한번 화장실을 가면서 보니, 설상가상 비까지 내린다. 이 비싸고 괴기스러운 호텔에서
하루를 더 묵어야 한단 말인가. 절망스러웠지만, 잠시 후 비는 그쳤고, 나는 가방을 어짊어지고
출발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좀처럼 택시를 타지 않는 나인데, 이번 여행에서는 택시를 자주 탄다. 이번에도
더이상 서 있기가 힘들어 택시를 타고 정류장까지 갔다. 갔더니, 나른까지의 책행은 없고, 발륵츠까지
가서 갈아타란다. 거의 비쉬켁까지 가는 거였다. 직행도 아니고, 이 몸으로 한번도 안가본 새로운
도시에 가고 싶지 않았다. 가방을 메고, 호텔을 찾아 헤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비쉬켁행
버스를 타버렸다.
설사로 시작된 몸은 몸살로 바뀌어 있었고, 내 한두마디 하는 터키어에, 너 키르기스말 하는구나하며
반갑게 차장아저씨가 말을 걸어왔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도 없었고, 알아먹으려는노력도
하기 힘겨웠다. 초인적인 힘으로 비쉬켁까지, 여기 숙소까지 찾아와 예전 쓰던 침대에 쓰러졌다.
내가 여기 도착했을 때에는 거의 텅 비다시피하던 숙소가, 오늘 낮이 되니 만원이다. 다시 북적거린다.
열도 거의 다 내린 듯하고, 두통도 거의 사라진 듯 하지만 설사는 여전해, 정로환을먹었다. 내일
저녁이면 오쉬행 밤버스를 타야하는데, 그때까지는 나아야하니까. 아니 그것보다, 이제 며칠 후면
파미르고원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몸이 약해지면, 고산병도 더 쉽게 오기 마련이니까. 파미르로
들어가기 전엔 건강을 회복해야지.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긴 여행에 몸이 지친건지, 많이 약해진걸 스스로도 느낀다. 몸이 약해지면,
맘도 약해지고, 그렇게 되면 여행에서도 재미가 덜해지는데. 하지만 괜찮을거다. 오쉬에 도착하고,
파미르를 향해 출발할 때쯤이면, 나는 다시 펄펄 날고 있을거다.
08/06/2008 08:21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