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깜빡 잠들었다 깨보니, 날은 밝고, 기사가 졸리는지 호숫가에 차를 대놓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나도 내려 기지개를 켜고, 사진도 찍었다. 다행히 별일은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고도 우리 차는 아침을 먹고 또 한참 쉬다가, 오쉬까지 가는 길에 온갖 마을에 다 들러 짐칸의
짐들을 배달하며 갔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마을에 티코가 그렇게 많은 거다. 택시는 거의 다 티코였고.
도대체 몇 대나 되나 싶어 헤어 봤다. 스무대를 헤아리는데 그중 12대가 티코더라. 네 대 중 한대가
아니라 세 대가 티코인거지. 나머지 한 대는 마티즈였고. 알고보니 우즈베키스탄에 대우자동차 공장이
있다는군. 그래서 티코를 비롯한 대우차가 많은 거겠지. 암튼 그 날은 내 생애 가장 많은 티코를,
하루동안 본 날이었다.
처음 그들이 말한 아침 8시에 도착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12시가 지나고, 2시가 지나면서
나도 슬슬 화가 났다. 우리 엄마 말대로 한국사람 이미지 나빠질까봐 어지간하면 성질 내지 않으려고
참지만, 내가 트럭을 찾은지 거의 24시간이 다 지난 오후 네시 반에야 오쉬 시내에 도착하는데,
날은 덥고, 졸립기도 하고, 정말 짜증나더군.
그래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성질 한번도 안내고 참고 지나간 건, 사람들이 다들 착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한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한국사람이란거 알고, 그들 중 하나가
나에게 처음 던진 말은 '주몽' 하는 거였다. 그 다음이 '장보고' 하는 거였고. 나는 본 적이 없어 주인공이
누군지도 모르는 드라마이지만, 여기 중앙아시아에서는 주몽이 아주 인기 있는 드라마였다.
이제껏 몰랐는데, 마지막으로 키르기스를 떠나기전에 보니, 오쉬의 바자르에도 배용준 이병헌을
비롯한 한국연예인들 사진을 많이 팔고 있더라. 그들이 한국에 관해 알고 있는 건, 주몽이라는 멋진
드라마인데, 거기다 플러스 성질 더러운 여자, 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줄 수는 없어 참은 거다.
비쉬켁에서 만난 일본친군에게 소개받은 숙소를 찾기는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숙소에서
비쉬켁에서 만나게 될 줄 알았던 일본아이를 만났다. 이야기를 하다가, 어! 비쉬켁 숙소 물어보는
메일 보내지 않으셨나요? 저예요! 하길래 깜짝 놀랐다.
그 아이도 5년 가까이여행중인 아이였다. 나도 꽤나 오랜시간 여행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물어
왔다. 오랜 시간 여행하고 있으면, 지치지 않으시나요? 하더라. 지치죠, 엄청나게 지쳐 있어요.
특히나 아프리카에선 맨날 싸움만 하고다녀서, 이렇게 화내고 싸우고 다닐거면 왜 여행을 하는가
모르겠단 생각도 했어요.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참 실망스럽죠, 했다.
그 아이도 꽤나 지쳐있는 듯했다. 그래서 요즘은 이곳저곳 다니며 새로운 경험을하는 것보다, 익숙한
곳에 오래 머무르며 쉬는 시간이 더 많다며, 지쳐서 파미르고원도 가지 않았다더라.
좀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 아이는 그날 저녁차로 비쉬켁으로 가려고 체크아웃을 한
상태였다. 진심이었는지 지나가는 말이었는지, 비쉬켁 가지 않으실래요? 했지만, 내가 진짜로
갈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다. 그것보다, 내가 그 아이에게 오쉬에서 하룻밤 더 묵고 가라고
잡아주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잡았으면 하루 더 있었을거 같은데 왜 잡을 생각을못했는지 모르겠다.
가지고 있던 고추장이랑 일본 즉석스프만 챙겨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을 기약하고 말았지.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지만,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듯 반가웠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게 되겠지.
지난 1개월간 가장 반가운 친구가 아니었나 싶다.
비쉬켁을 향해 출발하는 그 친구를 배웅하고, 그 친구랑 함께 있던 다른 친구와 함께,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수박을 샀다. 수박하면 환장하는 내가, 집 떠나고 지난 한달간 한번도 수박을 못 먹었었거든.
비싸서가 아니라, 싸서. 사려면한통을 다 사야하는데, 사서 혼자 다 먹을 순 없는 일이고, 공동으로
쓰는 냉장고 독차지하고 있을 수도 없고, 수박 사서 나눠 먹을만큼 친한 사람도 없었거든.
수박을사면, 호텔에서 먹을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니, 먹을 수 있을걸요, 하길래, 그럼 내가 수박을
사면 같이 먹을래요, 했더니, 그럼 자기도 반을 내겠다길래, 아니라고, 내가 사면 같이 먹어주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했지. 그래서 900원짜리 수박 한통을 사서, 오랜만에 실력발휘했지. 반통은
먹었을거다. 하루종일 굶고, 늦은 오후에 먹은 수박 반통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08/07/2008 05:20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