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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스탄에서 보낸 편지

5년만의 가을

도착한 날은 우선 쉬기로 했다. 이미 늦은 오후였고, 버스정류장까지 나와 있던 유명한 숙소의
주인을 따라 방부터 잡았다. 특별히 예약을 한건 아니었다. 그저 할일없는 오후에 그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모양이었다.

와노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남자는 상당히 재밌는 캐릭터였다. 영어도 잘 하고, 일본어도 독학으로
공부중이라는 말은 들었었는데, 자기 말로는 12개국어를 한단다. 하지만, 결국 그가 할줄 안다는
12개국어중 일본어도, 터키어도,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아니라는 게 나로 인해 판명되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과는 관계없이, 아주 특이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래도 해가 있는 동안은 견딜만 했다. 해가 지자, 카즈베기는 무서우리만치 추워졌다. 아직 10월의
중순인데 입김이 술술 나고, 집 안도 상당히 추워, 있는 옷을 다 껴입고, 빌린 스웨터를 입고도
모자라 나는 아래에 항공담요를 두르고, 위에는 침낭을 뒤집어 쓰고서는 지내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언덕 위의 교회로 가는 하이킹을 했다. 길은 비교적 평탄했고, 이미 가을이 깊어 온
산길을 헉헉거리면서도 우리는 한시간 반 만에 오를 수 있었다. 아! 가을이구나, 싶게 길에는 온통
낙엽이었고, 꼬불꼬불 산길은 노랬다.

교회는 언덕 아래에서 보던 때와는 달리, 작고 아담한 교회였다. 그루지아의 다른 교회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평범한 건축이었다. 하지만, 그 교회가 다른 교회들과 다른 건, 그 장소였다.
5000미터가 넘는 눈산, 카즈베기산을 뒤로, 바로 앞의 절벽 아래로 카즈베기 마을을 내려다보는
곳에 서 있는 거다. 그리고, 그냥 버스 타고 가서 보는 교회와, 산길을 타고 올라가 바라보는 교회가
같을 수는 없지 않겠니.

애써 언덕 위까지 올라가 교회만 보고 바로 내려오는 것도 뭔가 아쉬워, 좀 더 위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허허벌판 황야같은 길을 오르자니 바람은 무섭게 불고, 귀는 찢어질 듯 시렸지만, 우리는
한시간 정도를 더 뒷산으로 올라 가다가. 삼십분 정도만 더 걸으면 눈이 쌓인 곳까지 갈 수 있겠다
싶은 곳에서 뒤돌아 내려왔다. 가 봤자 풍경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고, 춥기만 할 것 같아서.

오르느라 힘을 많이 쓴 다리가 산길을 내려오자니 많이 후들거려, 오를때보다 더 힘들었지만,
가을을 만끽하며 우리는 산길을 걸어 내려와 숙소로 돌아왔다. 아주, 보람찬 하루였다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어두워지고 난 후에는 정말 할 일이 없었다. 양동이에 끓인 더운 물로 오들오들 떨며 샤워를 하고,
와노가 차려주는 지극히 단순한 저녁을 먹고나니 7시. 밤은 이제 시작인거다. 쉬쉬베쉬라는 중동의
게임을 수십판 하고, 둘이서 맞훌라를 수백판 해도, 시간은 좀처럼 흐르지 않았고, 끓여놓은 커피는
금방 식어 버렸다.

춥고, 길고, 지루한 밤도 지나고, 다음날 우리는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파키스탄의 훈자와 비교할 만큼 멋진 곳이긴 했지만, 오래 머물기엔 너무 춥고, 방한장비가 너무
없었다.

그러고보니, 처음 훈자에 갔던 때로부터 딱 5년이 지나 있었다. 5년만에 보는 가을산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때 가을의 훈자 이후로 제대로 된 가을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거다. 중동 터키
아프리카였으니. 오랜만의 가을 풍경이라 더 좋았던 카즈베기를 떠났다.

 

11/18/2008 09:54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