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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스탄에서 보낸 편지

카스피해를 건너 바쿠로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 그날도 야경은 못보지만, 그래도 이틀 꼬박, 투르크멘바쉬가 만들어 놓은
꿈의 도시를 구경하고, 아쉬가밧을 떠나야 했다. 빠른 걸음으로 숙소로 돌아가 차이 마시며 잠시
쉬었다가, 가방을 메고 역으로 갔다.

기차는 놀라우리만치 싸고 깨끗하고 쾌적했다. 중국산 기차였다. 내가 북경에서 우루무치까지
40시간동안 무려 170불을 주고 탔던 그 4인실 기차가, 14시간 짜리이긴 했지만, 달랑 4불에, 어쩜
그럴 수 있는지. 기차는 정말 싸고 좋았지만, 편하게 잠들지는 못했다. 우리칸에 누군가가 심하게
발냄새를 풍기면서 코를 골았기 때문이다. 결국 참지못하고 일어나 흔들어 깨우고 말았다.

기차는 투르크멘바쉬에 도착했다. 4일째의 아침이 되었고, 나는 여기서 바쿠로 는 페리를 기다려야
하는 거다. 5일짜리 비자니까, 이틀동안 배가 없으면 나는 불법체류를 하게 되는 거였다. 기차가
도착하기 전 항구를 지나는데 보니, 아제르바이잔 국기가 달린 커다란 배가 정박되어 있는게 보였다.
내가 타야할 배였다. 저거 놓치면 큰일이다 싶어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열심히 걸어 항구로 갔다.

서쪽으로, 카스피해로 왔더니 날씨도 완전 바뀌어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바람도
심하게 불어, 날은 꽤나 쌀쌀했다. 보기보다 항구는 멀어, 배낭메고 모래바람 맞으며 주춤주춤
걷다보니 삼십분 가까이 걸렸다. 열심히 걷는 동안 배가 떠나버리면 어떡하나 걱정도 했지만, 배는
우리가 타고도 한참이나 더 기다려 오후가 되어서야 출항했다.

혼자였으면 하지 않았을 실수를 여기서부터 하고 말았다. 배 안에서 먹을 음식물 준비와 남은
투르크멘 돈 환전을 못한거다. 식사는 배 안에서 맛없고 비싼 식당을 이용해야 했고, 투르크멘마낫은
결국 그냥 그대로 남아버렸다. 기념품으로 사람들에게 갈라주기에는 많은 돈이 남아버려서 어떡해야
하나 싶다. 이건 투르크메니스탄을 한번 더 가라는 신의 계시다! 생각도 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배는 출항을 못하고 있었다. 일단 출국심사대 거쳐 출국스탬프를 찍고 나왔으니,
이미 불법체류의 염려는 없었지만, 배는 언제 출항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던 아저씨들 말로는 사흘째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했다. 먹을 것을 충분히 못챙겨 온게 좀
걱정스럽긴 했지만, 90달러나 내고 방도 잡았으니 배안에서 못버틸 이유는 없었다. 45달러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90달러라는 말 듣고 깜짝 놀라긴 했지만. 첨엔 사기치는 줄 알았다니까.

오늘 중으로 못뜨겠군 싶던 배는 오후가 되자 출발했고, 크긴 해도 호수를 가는 거라곤 상상도 못하게
흔들렸다. 비싼 방도 잡게 되었으니 샤워도 하고, 빨래도 해 놓고, 책상에 앉아 편지도 쓰려고 했지만,
책상 앞에 앉아 있으려니, 파도가 창문을 넘어 방안까지 물방울이 튀고, 미친듯이 출렁거려 속이
울렁거렸다. 도저히 더 앉아 있을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편지쓰기도 포기하고 드러누웠다.

열두시간 걸리는 배가새벽 서너시에 도착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파도가 출썩이는, 흔들리는 배
안에서 잠이 들었다. 배를 타고 건너면서 보니, 카스피해는 바다가 맞더라. 카스피해는 카스피호가
아니라 카스피해라고 불리는게 맞다. 예전의 의문이 스스로 풀렸다.

드디어 배는 항구에 도착한 듯, 닻 내리는 소리가 들렸고, 큰일났다 싶었지만 별일 없었다. 배는 항구에
들어간 채 서 있었고, 부두로 들어가지는 않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흔들림도 멈추었고,
잠이나 더 잘까 하다가, 어슴푸레 밝아오기 시작하는 밖을 보러 나갔다.

바다에서 바라본 바쿠는 아직 밤이었다. 옛 역사이야기에 등장하는 범선들이 들어서 있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났지만, 그런 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바쿠는 특별한 도시는 아니었다.

엄청난 양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의 바쿠가 그저 작은 어촌에 불과했듯, 내가
중앙아시아의 목표한 루트를 완성한 지점이 아니었다면, 바쿠는 내게도 아무런 특별함 없는, 그저
크고 복잡한, 물가 비싼 한 나라의 수도에 불과했을 거다.

찬란하게 아침해가 떠올랐고, 배 안 전체의 화장실을 쓸 수 없게 되어, 승객 전원이 아침의 볼일을
참느라 고통에 허덕인 사실을 제외하면, 아무런 문제없이 배는 항구로 들어갔다. 배가 항구에 닿고
한참, 입국심사대 앞에서 줄 서서 또 한참 기다려, 정오가 살짝 넘은 시각에 우리는 입국 스탬프를 찍고,
아제르바이잔의 땅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이슬람 국가에서 라마단이 시작되고 있었다.

 

10/08/2008 10:38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