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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다시인도에서 보낸 편지

역시 인도는 멋진 곳이다.

푸리는, 4년만에 다시 간 푸리는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그대로였으면, 아무 것도 변한 것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내 욕심이지. 길도 많이 깨끗해지고, 새로운 건물도 제법
많이 들어서 있었다.

그렇지만 거의 대부분은 그대로였다. 길가의 개나 돼지들, 시끄러운 까마귀들, 밤이면 극성인
모기, 해변의 높은 파도나 강한 바람, 모두가 잠든 밤이면 희미하게 들려오는 파도소리. 그것
만으로도 푸리는 충분히 푸리였다. 내 기억속의 푸리를 다시 느끼기에 충분했다.

푸리는 이번 여행 1단계의 마지막 포인트였다. 푸리에서 시작된 일이니, 푸리에서 다 정리하자고
생각했었다. 처음 만나서, 몇번이나 같이 온 곳이 푸리였고, 마지막에 신세 많이 진 곳도
푸리였다. 그는 죽기 전에 인도에 가자고 했었다. 푸리에 사과하러 가자고. 같이 한번은 더
오려고 했던 곳인데, 혼자 간 푸리에서, 숙소 주인은 나를 기억해 주었다. 이름까지 기억해 주고,
그의 안부를 물어왔다.

2주 가까이 푸리에 머무르는 동안, 만화책만 열심히 읽었다. 숙소에서 주는 아침과 저녁 외에는,
거의 음식도 먹지 않았다. 위장 상태가 좋지 않아 소화력이 떨어진 데다가,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으니 배도 안 고프더라고. 그래도 가끔은 땡볕을 걸어 밖으로 나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파도가 높은 바닷가에 나가 앉아 있기도 하고, 몇번 안가고도 단골이 되어버린 짜이집에 짜이를
마시러 나가긴 했다.

그런 것들 말고, 푸리에서 뭐가 더 필요하겠니. 그러려고 간 곳인데. 예전에 푸리에 갈 때마다
즐기던, 그 여유를 즐기러 간 건데. 딱 하나 그때와 다른게 있다면 푸리에 갈 때마다 늘
함께였던, 그 아이가 이제는 내 옆에 없다는 사실이지. 이젠 진짜 그만하려고, 청승 떠는거.
나름, 정리하고, 처음 장소였던 푸리까지 갔으니, 이제 즐거운 내 여행 다시 시작하려고.

부모님께도 메일을 보냈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나는 그동안 그 부모님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거든. 다시 나오지 못하게 말려달라고 부탁했을 때, 자기도 어쩔 수 없으니 내 숙제는
스스로 해결하라며, 결국 다시 나오게 내버려두어 이런 결과가 되었다는 생각에, 가당치도 않게
나는 그 부모님을 원망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속상하고, 가슴 아팠을 그 분들을. 이제는 그분들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게 된 걸 보니, 내가 많이 정리가 된 모양이다.

이제 인도를 떠난다. 잠시 떠났다 다시 들어올거다. 인도에서 시작된 여행, 다시 인도에서
시작하려고. 이제 여행의 후반전이 시작될거다.

첸나이로 내려오면서 보니, 남인도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예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 아이와 같이 오려고, 남겨 두었던 남인도인데. 혼자서 봐도 예쁘겠지.

첸나이는 많이 더웠다. 한낮이면 아스팔트가 녹아 발밑이 출렁이는 느낌이었고, 쓸데없는 일에,
사람들한테 괜히 짜증을 내고 다닐만큼 덥고, 힘들었다. 첨엔 모두가 나한테 바가지를 씌우려
드는군 생각했지만, 그냥 다른 도시보다 물가가 비싼 거였고, 이 더운 날씨에 그들은 짜증도
내지 않았다.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며 하루종일 호텔 로비에 앉아 생각을 해보니, 난 여기서는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 땅을 살고 있다. 이 더운 땅을 신나게 살며 나 같은
짜증쟁이를 말없이 꾸짖고 있었다.

이제 첸나이의 국제공항. 조금은 춥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출발라운지에 앉아 다시 생각해보니,
부끄러워진다. 그거 그 더위, 뭐라고 그렇게 견디기 힘들었을까. 다시 돌아오면 더운 인도에,
다른 모습 보여주리라, 생각도 한다.

나는 역시 인도가 좋다, 라고 첸나이로 내려오는 뜨거운 기차안에서 나름 멋지게 넘어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깨달았었다. 인도를 잠시 떠나려 하는 지금, 다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지금 같은 생각을 한다. 역시 인도는 멋진 곳이다. 난 역시 인도가 좋다.

비록 지난 인도를 함께 했던 그는 지금 없지만, 그를 만나게 해 준 곳도 인도였고, 그가 없어도
인도는 역시 멋진 곳이고,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가 없는데도, 세상은 달라진게 아무것도
없고, 여전히 아름답다는 사실에 미치도록 슬프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이 멋진 세상 다 보지도
못하고 급하게 가버린 그가 밉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살아, 이 멋진 세상 볼 수
있음에 행복해하며 살란다.

내 여행은 계속된다.

 

04/20/2008 08:43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