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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스탄에서 보낸 편지

안녕! 아르메니아

이제는 25일간 머무른 아르메니아를 떠나 다시 그루지아 트빌리시로 국경을 넘는 기차 안이다.
오래 있었다. 비자 받느라 보름을 붙들려 있었던 타지키스탄 만큼이나 오래 있었다. 두샨베
만큼이나 오래, 예레반에 머물렀지만, 두샨베처럼 싫지는 않았다.

많은 시간을 보낸 숙소도 두샨베의 호텔처럼 싫지 않았고, 예레반의 물은 하수도가 두샨베의
상수도보다 깨끗했다. 무엇보다 어쩔 수 없이 붙들려 있었던 게 아니라, 내가 좋아 머물렀던 곳이라
좋았던 거겠지.

예레반의 숙소도 중앙아시아나 카프카스의 다른 많은 곳들에서처럼 민박에 머무르게 되었다.
키르기스에서부터 몇번이나 정보노트에 적힌걸 보고, 가야지 하던 곳이었고, 호텔이 비싼
예레반에서, 알려진 다른 민박집보다 싸고 기차역에서 가까워 찾기 쉬운 곳이어서 가기로 했던
곳이었지만, 아르메니아를 떠나는 지금, 그 집은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 가장 편한
곳이 되어 버렸다.

마당의 테이블에 앉아 있으려면, 가끔 아르메니안 커피를 내어주시던 맘좋은 리다할머니와 언제나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거나, 통통한 손자 아람과 그림처럼 앉아 계시거나, 도대체 잠은 언제
주무시나 싶게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도 마당에 앉아 담배를 태우시던 멋진 할아버지, 내가
아람! 하고 외치면 나보다 먼저 온 한국 여자애한테 배운대로 누나! 하고 답하던 비만아, 두살이 채
안되었을 귀여운 손자 아람과, 동생에게 모든 걸 빼앗겨버려 늘 심술을 부리던 그의 형 카를로스.

그리고 많은 가족들. 마당의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가족이 보였다. 그들은 가족이구나. 저 사람들이
가족이구나. 보고 있는 것 만으로, 나는 그들의 행복이 느껴졌다. 나는 마당에 앉아 그 그림들을
보는 걸 좋아했다. 그 시간들이 가장 따뜻했고, 그래서 예레반에서 지나가는 하루하루가 아깝지
않았다.


다시 예레반으로 돌아와서는 4일을 머물렀다. 국립박물관을 다녀온 것 말고는 특별히 한 일은 없다.
오페라 공연이 있다면 보고 싶었지만, 시즌이 끝나버린 건지, 이 달에는 공연이 없다고 했다.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곳에 가르니 유적이 있었지만, 시외 관광은 이미 충분히 한 상태라 더
이상 의욕이 없었다.

빨래를 하고, 근처 공중샤워장에 가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낮이면 아람이랑 놀거나, 시내로
나가 산책을 하고, 밤의 분수쇼도 한번 더 보고, 밤에는 사람들과 어울려 게임을 했다. 한달 전엔
한여름처럼 덥고, 밤이면 선선한게 딱 좋더니, 그간 가을이 깊어져 아침저녁으로 찬물에 세수를
하는 것도 괴로울 정도가 되었다.

밤에 게임을 할 때면, 있는 옷 다 껴입고 담요까지 둘둘 말고도, 손발이 꽁꽁 얼어붙었다. 뜨거운
커피를 끓여도, 컵 안에서 커피는 금방 식어버렸다. 그러면서도 꽤나 늦은 시각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게임을 했다.

아르메니아 한달 가까운 시간, 나로서는 드물게 이곳저곳 관광도 많이 했다. 아라랏산을 등지고 서
있는 호르비랍 교회에도 다녀왔고, 카프카스에서 가장 큰 호수, 세반에도 다녀왔다.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성창, 룽기누스의 창이 보관되어 있다는 에치미야진 대성당의 일요미사도
보고왔고(안타깝게도 룽기누스의 창은 보지 못했다) 그루지아와의 국경마을 알라베르디에도
다녀왔다. 아르메니아 안의 공화국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다녀오는 길에 고리스와 타테브도 보고
왔고, 박물관도 몇군데나 구경했다.

대사관에도 '아르메니아 도발에 의한 결과'라는 온통 시뻘건 지도를 걸어 놓을 정도로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이를 갈던 것에 비해,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아제리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고, 그들은
터키에 의한 피해 쪽에 더 관심이 많았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사람들은 당한 것을 더 오래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터키의 동부에 있는 아라랏산과 반호수까지도 자기들 땅이라 생각하고, 언젠가는
되찾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은 듯, 국민의 담배가 '악타마르'인데에는 나도 놀랐다. 악타마르는
반 호수 안에 있는 섬 이름의 유래가 된 처녀의 이름이거든.

아제르바이잔과도 터키와도 사이가 나빠 국경이 닫혀 있는, 외롭고 힘든 나라 아르메니아를 나는
이제 떠난다. 전혀 외울 의사가 없었던 아르메니아어도 몇마디 하게 되고, 인쇄가 잘못되어
한귀퉁이가 잘려나간 것 같이 생긴 아르메니아 글자도 꽤 읽을 수 있게 되고, 동네 사람들이랑도
안면을 터 인사도 주고 받게 되자, 나는 또 떠난다. 달팽이처럼 내 모든 짐을 등에 짊어지고 나는
다시 떠난다.

 

10/19/2008 02:23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