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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아프리카에서 보낸 편지

수단을 떠나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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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생각보다 쾌적하다. 이제껏 타 본 어떤 배들보다도, 깨끗하고, 바다 아닌 호수 위를 달리는
거라 파도가 없으니 흔들리지도 않고, 비싸서 그렇지. 우리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배에는 외국인이
세 명이나 더 있었다. 아디스에서부터 자기들 차로 온 독일 아저씨들 두 명과 그 아저씨들한테
꼽사리 껴서 온 중국 여자애 한명.

아프리카에서 중국 여행자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지난 5년간, 중국인 여자 여행자를 본 것도
처음이었다. 영어를 엄청나게 잘해서 내가 기죽는거 아닌가 좀 걱정이 되기도했는데. 왜냐면 지금
여행을 나오는 아이들은 다들 부자고 교육 많이 받은 아이들이 많거든. 이제까지 만난 중국
여행자들은 다 그랬었고. 그런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더군.

에티오피아에서 사람들이 차이나!라고 부르지 않더냐고, 그러더라. 그래 그렇더라고. 내가 원래
중국을 좋아했었는데, 그게 너무 스트레스라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중국이 조금 싫어졌다고. 그럴때
너는 어떤 기분이 드느냐고, 물어봤다. 차이나! 라는 외침에 진짜 중국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까.
별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더라. 그 아이가별로 오래 있지 않아서 별로 듣지 않은건지, 중국
사람이니까, 중국이라고 부르는게 기분 좋은건지, 어떤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배는 아부심벨 앞을 통과해 왔다. 우리는 아부심벨이 잘 보일만한 곳으로, 갑판 위로 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좀 춥긴 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이제 곧 나타날, 야간 조명을
밝혔을 아부심벨을 기다렸다. 이 배를 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거니까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배를 타고 지나온 호수가 없었다면, 그 호수를 있게 한 댐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아부심벨은
지금의 수면보다 더 아래에 위치하고 있을 터였다.

댐이 만들어지고, 아부심벨신전, 3000년도 더 전에 람세스2세가 만든 그 오래되고 위대한 신전은
수몰될 위기에 처했었다. 그래서 유네스코에서(유네스코, 맞을거다) 아부심벨을 조각조각 잘라내,
지금의 위치에 그대로 옮겨놓은 거다. 호수쪽에서 바라보는 밤의 아부심벨신전은 뭐, 그닥 기대도
안했지만, 그냥 그랬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아부심벨을 보고, 추운 몸을 녹이며,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잘 시간이 되었다. 보통
배낭여행자들은 2등칸을 사서 1층의 객실의자나, 좀 추워도 침낭 속에 들어가 갑판 위에서 잔다.
우리 다섯 명도 영국아저씨 말고 네명은, 그렇게 할 거였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독일아저씨 두명과
중국여자애도 돈을더 내고 1등칸을 샀다는 거다. 나만 남은 거다. 잠깐 고민을 해 봤다. 나도 살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럭셔리는 좀 아닌 것 같았다.

영국아저씨는, 첨부터 자기 방에서 자기는 바닥에 잘테니, 나더러 자기 침대에 자라며 선심을
베풀었지만, 이슬람 국가에서, 다른 현지인도 자는 남자방에서 그렇게 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안된다는 소리를 듣고, 계속 내걱정을 했다. 나는, 괜찮다고, 나는 나무의자에서도 잘
자고, 현지인들과 함께 바닥에서도 뒹굴며 잘 자는 사람이니까 괜찮다고, 걱정말라고 말했지만,
아저씨는 11시가 넘도록 같이 있어줬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좀 불쌍해 보이나 보다. 항상
누군가가 내 걱정을 하게 만드니.

나는 편하게 1등객을 위한 식당에서 잤다. 1층이나 갑판처럼 춥지도 않았고, 불편하지도 시끄럽지도
않았다. 쿠션 깔린 의자에서 두다리 쭉 뻗고, 아주 쾌적하게 잘 잤다. 아침에는 일어나서 씻고,
해뜨는 것도 봤다.

10시쯤, 배는 아스완에 도착했다. 아스완에는 도착했지만, 항구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에 작은
배가 한 척, 입국관리소 직원들을 싣고 왔다. 참으로 희한한 시스템이다. 항구에 들어가고, 내려서
차근차근 한사람씩 도장찍고 나가면 될 것을. 직원이 와서, 배 안에서 도장을 다 찍어준 다음에 다시
배가 항구로 들어가는, 그러고도 다시 커스텀을 통과해서 나가야 하는, 참으로 불편하고 희한한
시스템이다. 어차피 마지막 한사람까지 다 도장을 받지 않으면 배는 움직이지 않을텐데도, 그 도장
조금 더 먼저 받아보겠다고, 배 안이 또 완전 아수라장이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 두어시간, 카오스의 시간 동안 우리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내가 너무 태연하게 아래층에는
관심도 없이 갑판에서 혼자 노는 걸 보고 독일 아저씨가, 넌 참 참을성이 많구나, 했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으나, 태연하게 있으나 똑같으니까. 바뀌는 것도 없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