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08 스탄에서 보낸 편지

두번째 아시아횡단

터키로 국경을 넘을 때는 트라브존이랑 카파도키아에서 이삼일씩 쉬어, 1주일이면 이스탄불에
도착할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트라브존 3일에, 카파도키아에서는 3주를 쉬어 버렸고, 예정에도 없던
파묵칼레까지 1주일 넘게 쉬어버린 바람에, 이스탄불에 도착하기까지 한달도 넘게 걸려버렸다.

오랜만에 돌아온 터키가 편하고 좋았고, 이런저런 심경의 변화도 있었거든. 하지만 어쨌건 나는
이스탄불까지 무사히 도착했고, 5년만에 다시 한번, 다른 루트로 아시아횡단을 끝냈다.

그리고 지금은 예루살렘이라는, 전혀 상관없는 도시에 앉아 편지의 마지막을 쓰고 있다.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 여행도 끝났고, 올해도 거의 끝나간다. 미루고 미루다가, 올해가 끝나기
전에 지난 여행 이야기도 마무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맘 잡고 쓰는 거다.

중앙아시아 여행은, 참 좋았다. 자연도 좋았고, 사람들도 좋았다. 한 가지 아쉬웠던 건,
중앙아시아에서는 여행동무가 없어 좀 외로웠다는 거. 세상 어디에나 있는 일본 아이들은 몇
만났지만, 그 아이들은 내 친구가 되기는 커녕, 날 자존심 상하게만 했다.

가장 기분이 나빴던 건 비자문제. 일본 아이들은 키르기스탄 무비자에 카자흐스탄과 타지키스탄도
무료로 받을 수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전부 돈주고 받아야 하고, 우즈베키스탄도 일본사람은
15달러만 받을 수 있는 비자를, 나는 한국에서 여행사 통해서 175000원이나 주고 받았거든.
안그래도 기분 나쁜데, 니들 돈만 내면 비자가 나오긴 나오니? 하는 식의 말로 한국을 후진국
취급하며 내 속을 긁었다. 일본애들은 50유로 내야하는 이란 트랜짓 비자를 나는 20유로 주고
받았지만, 그걸로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미국이나 다른 유럽국가들과 비교해도 한국은 비자 받기 편한 나라인데, 늘 만나는게
일본아이들이고, 늘 이야기를 하는게 일본아이들이니 기분 나쁘게 비교가 되어 버린다. 우리보다
배낭여행의 역사가 길고, 그러다보니 정보도 많고, 어디가나 일본아이들한테 정보를 얻어 다니고
있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내가 일본아이들 많이 모이는 가장 싼 숙소에서, 일본어 가이드북과
정보노트를 보며 정보를 수집해서 여행한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까지 했다.

좋은 여행자들은 많이 만나지 못했지만, 그래서 줄곧 혼자였고, 그랬기 때문에 정말 좋은
현지인들은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왜 나한테 잘해주는 거냐고, 당신 왜 나같은 인간에게마저
베푸는 거냐고, 성질을 내주고 싶어질만큼 착하고 선량한 사람들, 천사같은 사람들이었다.

아프리카에서는 다들 내 것을 뺐고 얻어가려고만 했는데, 중앙아시아에서는 다들 주려고만 했다.
아프리카를 다녀온 후라, 그들의 선량함이 더 눈에 띄었으리라. 그들에게 나 자신을 비추어 볼수록
스스로에게 혐오감만 더해갔다. 이번에 타지키스탄이 내 베스트5에 들어가게 된 건, 역시 그
사람들 때문이었다.

세 가지 목표, 파미르고원, 우즈벡 유적, 카스피해 건너기도 무사히 달성했고, 여러가지 재미있는
무용담도 많이 만들었다. 차바퀴가 불꽃에 휩싸인 거 하며, 험준한 길에 살짝 기절하기까지 하고,
투르크멘 비자 받느라 우울증까지 걸려가며 기다렸던 일, 투르크멘에서의 빡신 사흘 후 배탄 거
하며 아제르바이잔에서 노숙할 뻔하다 구제받은 것, 아르메니아, 그루지아에서 추위에 떨던 일들.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만들며 막을 내린 이번 중앙아시아 카프카스로의 여행은 참, 찐했다.
고생도 많이 했지만 참 재밌었다.

정말 좋았지만, 하지만, 다시 한번 그 길 가고 싶으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내 답은 정해져 있다.
난 새로운 길을 가고 싶다. 갔던 길을 다시 가는 익숙함도 좋지만, 그래도 아직은 새로운 길을 가는
설레임이 더 좋다.

나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12/23/2008 11:16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