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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신대륙에서 보낸 편지

생애 첫번째 화산


엘살바도르까지 왔다. 푼타고르다에서 배를 타고 건너 도착한 푸에르토 바리오스에서
3일을 머문 후 곧장 안티구아로 갔다. 안티구아에서는 한달이 넘게 머물러, 내가 과연
여길 뜰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잠시 휩싸이기도 했지만, 다행히 이번엔 날 잡는
사람들이 없어 쉽게 뜰 수 있었다.


푸에르토 바리오스는 항구도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거대한 트레일러들이 줄을
지어 달리느라 길은 늘 먼지가 일었고, 온갖 인종들이 다 모여 있었다. 꽤나 큰 시장을
구경하는 것 말고는 정말이지 할 일이 없는 곳이었지만, 물가가 비싸던 벨리즈를 떠나,
맘 편하게 좀 쉬고 싶어 비교적 좋은 방에서 편하게 사흘이나 쉰 거다.

꽤나 큰 시장에서 싼 정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맘 편하게 쉬기 위한 조건에, 싼 물가는
필수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그러고는 곧장 안티구아로, 주변의 다른 유적지들은
생략하고 직행버스를 타고 간 거지.


사실 다른 외국인 여행자들은 푸에르토 바리오스에 가지 않는다. 볼 것 없거든. 다들
여기보다는 근처에 있는 리빙스톤이라는 곳으로 가지. 근처에 세묵 참페이라는
파묵칼레 비슷하게 생긴 유명한 관광지도 있고 말이야.

우리는 별다른 주저 없이 푸에르토 바리오스로 정했다. 벨리즈와 비슷한 분위기의
관광지 리빙스톤보다는, 사람들이 모여서 복작복작 살고 있는 항구도시가 더 관심을
끌었거든.


한달이 넘게 안티구아에 머무는 동안, 장기체류를 하게 되면 늘 그렇듯 별다르게 한
일은 없다. 그래도 화산은 구경했다. 과테말라에는 아직도 활화산이 몇 개나 있거든.
그 중 하나, 안티구아에서 가장 가까운 파카야라는 화산에 투어로 다녀왔지.

버스타고 한시간 반, 걸어서 두 시간을 트래킹 해서 가야하는,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닥 힘든 길도 아니었다. 게다가 우리 팀엔 모녀가 함께
참여한 사람들이 있어서, 그 어머니의 속도를 맞추다 보니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산책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건,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 다니며 말을 타라고 부추기던
말몰이꾼들이었다. 그들이 우리를 따라다니면 심한 말똥 냄새도 따라 다녔으니까.
게다가 그들이 이미 뿌려놓은 말똥이 편하지만은 않은 산길을 더 피곤하게 했다.


그래도 마지막 30분은 아주 힘들었다. 현무암 부스러기들이 쌓여 있어 가파른 오르막은
미끄러웠고, 한발 디디면 한발 미끄러져 내리는 상황이라, 좀처럼 앞으로 전진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상을 오른 후엔 굳은 용암 위를 걸어갔다. 굳어버린 용암 아래에는
아직도 용암이 흐르고 있어 뜨거웠고, 갈라진 틈 사이로 벌건 용암이 보이기도 했다.

자칫 갈라진 틈 새로 발을 헛디디거나, 약해 보이는 발 아래가 무너저기라도 한다면,
재도 없이 사라질 판이군 생각하니 오싹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하루에도 수백명씩
다니는 그 용암 바위는 그렇게 약하지 않은 모양으로 그런 사고가 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화산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영화에서 보거나 사진을 볼 땐 산 꼭대기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었지만, 이번에 우리가 간 화산은 용암이 분출하는 분화구가
아래에 있었다. 산 꼭대기의 분화구는 이미 죽어버렸고(혹은 쉬고 있고), 산 중턱의
한 지점을 뚫고 용암이 분출되고 있었던 거다.

시뻘건 용암이 흘러내리는 모습은 참 신기했다. 이제껏 많은 나라들을 다니면서
이것저것 많이 봐 왔지만, 살아있는 화산을 보는 건 처음이었거든. 그랬으니 내가
투어를 갈 생각을 했겠지만 말이야. 산타는 걸 엄청 좋아하는 몇몇 유럽 사람들이
분화구 근처까지 내려가 지팡이에 불을 붙여 담뱃불도 붙이고 마쉬멜로우를 구워
먹기도 하고 했지만, 나는 다시 올라오는 것이 귀찮아서 안내려갔다. 위에서 봐도
충분히 신기했으니까.


해가 지기 시작하고 우리는 돌아가는 길을 서둘렀다. 가파른 모래 언덕은 내려가는 길이
더 힘들었다. 한발만 디뎌도 서너발씩 미끄러져,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었다. 몇 번,
엉덩방아도 찧고, 신발 안엔 현무암 부스러기가 가득 차고서야 겨우 언덕을 내려올 수
있었고, 어느덧 주위는 어두워지고 있었다. 날이 흐려 석양은 못 볼 거라 생각했었는데,
서쪽 하늘엔 멋지게 물든 구름이 가득 걸려 있었다.


깜깜해진 산길을, 말똥을 밟지 않도록 조심해가며 걸어 주차장까지 돌아온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동네 아이들과 개들이었다. 돈 달라, 과자 달라, 남은 마쉬멜로우 달라,
이것 달라 저것 달라하며 귀찮게 달라붙었다. 그 아이들은 그런 말들을 영어로 했다.
과테말라에서 이렇게 많은 인원수의 사람들이 영어를 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필요는 학습을 낳는다. 화산이 아이들을 다 버리는 건지, 도움을 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산을 탄 거였다. 산길을 내려오며, 내가 이전에 마지막으로
산을 탄 게 언제였나 기억을 더듬어보니, 작년 가을이 오고 있던 그루지아의 카즈베기가
마지막이더군. 거의 1년만인 거지. 아무리 움직이는 거 귀찮아하고, 산 타는 거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좋은 자연들을 너무 무시하며 다녔나 싶은 생각도
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