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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신대륙에서 보낸 편지

산호세와 마누엘 안토니오 국립공원

그래도 다른 나라의 수도들에 비하면 산호세는 아주 조용하고 안전한 곳이었다. 게다가
중심이 되는 도로의 양쪽 한블럭 안쪽 길은 보행자천국으로 되어 있어서, 걸어다니기도
아주 좋았다. 이틀밖에 머물지 않은 산호세에서는 카르타고에 다녀온 것 외에도, 동물원
구경하고, 국립극장도 구경했다.


야생동물들로 유명한 코스타리카인데, 국립공원인 산타엘레나에서 비만 맞고 동물들은
하나도 못본게 좀 억울해서, 동물원으로 갔지. 유명한 새 몇 마리 정도는 봐 두고
싶잖아. 동물원에 도착하고 몇분 지나지 않아 또 폭우가 쏟아져서, 동물을 구경한
시간보다 관리사무소 처마밑에서 비 구경한 시간이 더 길었지만, 투칸이나 금강앵무
(Scarlet Macaw) 같은 특이하고 예쁜 새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다른 동물들도 많이 있었지만, 동물원보다는 숲에서 볼 수 있는 동물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다니다보면 이구아나는 수없이 보이고, 바닷가쪽 더운 동네에선 유심히 보면
나무늘보도 엄청 많다.


그리고 둘째날 낮엔 국립극장을 구경하러 갔다. 코스타리카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국립극장의 창문이 깨지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코스타리카 국민들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 건물이라길래, 한번 보고 싶잖아.


입장료가 좀 비싸도 지불할 각오를 하고 극장 안으로 들어선 시각이 열두시 쯤,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첨엔 유럽 단체관광객인가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단체관광객이라고 해도, 사람이 너무 많은 거다. 티켓 판매소의 줄이 엄청 길고, 다들
티켓을 들고 있는데, 나도 입장권을 사야하니 티켓 판매소 앞을 서성거리고 있으려니,
어떤 아저씨가 말을 건다. 여기 아주 좋은 공연이니까 표 사란다.


우연히, 나는 미니 콘서트를 구경하게 된 거였다. 게다가 티켓은 아주 쌌다. 자리 따라
다른데, 내가 산 티켓은 500원짜리였다. 아주 싸게 현악5중주의 한시간짜리 연주를
듣고, 국립극장 구경을 한 셈이지. 아주 오랜만에, 완전하진 않지만 클래식을 들으니까,
맘이 편해지더라. 더불어 잠도 오더군. 하품 나오는 거 억지로 참고 끝까지 들었다.


대도시에서 그정도 구경했으면 됐다 싶어서, 이제 산호세를 떠날 준비를 했다. 하루 반
동안 아주 알차게 구경한 후, 나는 태평양 연안의 마누엘 안토니오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태평양과 카리브해 사이에 위치한 나라들을 계속 다니면서, 카리브해는 몇 번이나
봤지만, 태평양은 한번도 못봤거든. 그래서 중미의 태평양도 가보고 싶다는 마음과,
하루만에 국경까지 가기에는 좀 멀다는 생각에 마누엘 안토니오에서 쉬었다 가기로 한
거지.


태평양 연안에서도 내가 마누엘 안토니오를 가기로 한 것은, 거기에 유일하게 싼
호스텔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숙소는 싼 곳이 있었지만, 몇몇 호텔과 레스토랑
밖에 없는 마을 아닌 마을, 마누엘 안토니오에서는 싸게 식사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결국 돈은 엄청 썼다. 게다가 공원 입장료까지.


게다가 국립공원 안을 걷다가 샌달이 튿어졌다. 갈까 말까를 살짝 고민하기도 했지만,
안가면 후회할 것 같아 일단 가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높은 나무 위에서 나무늘보가
아주 느리게 몸을 움직이는 것도 보였고, 딱따구리가 나무 기둥을 부리로 쪼아 구멍을
파고 있는 것도 봤다. 날개가 파란 나비도 보였고, 이구아나와 도마뱀들도 잔뜩 보였다.


가이드를 낀 백인 관광객들이 망원카메라로 나무 높은 곳의 동물들을 구경하느라 서
있던 메인 산책로에서 동물들을 꽤 많이 본 나는 왼쪽으로 꺾어져 들어갔다. 길은 비에
망가져 있었지만, 사람이 별로 안다니는 그런 길에서야 말로 더 많은 동물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용감하게 걸어갔다. 원숭이들이 잔뜩 있고, 거대한 쥐 같은
동물도 있었다.


전망대까지 걸어서 올라갔다가, 같은 길을 걸어나오다 왼쪽으로 꺾어 샛길로 빠졌는데,
공원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길은 더 엉망이었다. 진흙 같은 길을 걷다보니
샌달이 땅에 달라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고, 얕은 강을 건너기도 했는데, 결국 걷기에
슬슬 지쳐갈 무렵, 진흙 속에 빠졌던 샌달이 끊어진 채 딸려 온거다. 끈이 끊어진 순간,
아 씨벌, 괜히 왔어!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도저히 끊어진 샌달로는 걸을 수가 없었으므로, 끊어진 왼쪽은 맨발로 걸었다. 샌달을
신고 있을 때에는, 되도록 흙이 발에 묻지 않도록, 발을 더럽히지 않도록 걸었지만,
샌달이 없는 지금은, 피해 다니던 그 진흙 속으로, 썩은 낙엽들 위로 발을 디뎌야 했다.
하지만, 더럽다고 피해 디디던 진흙과 낙엽이 내 맨발엔 덜 아파 고마웠다.


발을 다치지 않도록 땅만 쳐다보며 한참을 걷다보니, 나는 그만 길을 잃었다. 숲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 놓은, 확실하게 표나는 길만 걸었는데, 어떻게 거기서 길을 잃을 수가
있는지, 나 정말 너무 심한 길치인 것 같다. 한참을 헤매다 결국, 맨발로 걷기 시작한지
한시간여만에 나는 겨우 숲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선 숙소로 돌아가 운동화로 갈아신고 다시 올 생각이었으므로, 나는 다시 그 정돈된
산책로를 따라 입구까지 나가야했다. 들어올 땐 잘 다져져 아주 편하게 느껴졌던 그
자갈길이, 맨발이 되고 보니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 여전히 땅바닥만 보며 절룩거리며,
들어올 때보다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길을 걷자니, 누군가 서툰 영어로 말을 걸었다.


스페인에서 온 올리비아가 입구까지 자기 샌달을 신으라고 했다. 올리비아가 그렇게
예쁘게 보였던 건, 그 상황 때문이었을까. 이제껏 내가 본 스페인 여자들 중에서 가장
예뻤다. 덕분에 시간도 절약했고, 발도 덜 아팠다.


숙소로 돌아가서 점심을 먹고, 발을 씻은 후 운동화로 갈아신고 다시 공원으로 돌아가
반대편에 있는 비치를 구경한 후 다시 돌아와 인터넷을 하면서 맥주를 마시고, 그렇게
코스타리카에서의 마지막 날이 지나갔다.